김창열 (화가, 1929–2021)
- 출생·사망: 1929년 평안남도 맹산 출생, 2021년 별세
- 대표작: ‘물방울’ 회화로 전 세계에 알려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 생애 요약:
- 16세 월남 후 미술 공부, 서울대 입학 → 6·25 와중 학업 중단
- 1957년 앵포르멜 운동 주도, 1961년 파리·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여
- 1970년대 초 파리에서 ‘물방울’ 연작 시작, 이후 전 세계적 명성
- 회고전: 2004년 파리 쥬 드 폼 국립미술관,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설립 등
작품 해석
물방울은 전쟁과 상실의 트라우마를 정화와 치유의 상징으로 표현한 장치였습니다.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라는 그의 말처럼, 자아를 비우는 수행의 의미를 담았다.
소장 및 평가
국내외 주요 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쥬 드 폼 뮤지엄, 도쿄국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3년작 한 작품이 홍콩 경매에서 약 5억 원 낙찰될 정도로 상업적·예술적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https://namu.wiki/w/%EA%B9%80%EC%B0%BD%EC%97%B4(%ED%99%94%EA%B0%80)
김창열(화가)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김창열 대한민국 의 화가. '물방울 화가'라고 불린다. 한국 예술사와 미술사에서 빼놓을
namu.wiki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사사해서 서예를 익힌 그는 붓글씨를 통해 회화를 접했고, 광성고보 시절 외삼촌으로부터 데생을 배우면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6세 때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6.25 전쟁이 벌어지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전쟁 후 서울대학교에 다시 등록하려고 했으나 월북한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등록이 거부된다. 이후 군 복무를 대신 했던 경찰직에 눌러앉았고 부평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1955년 고등학교 교사 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경찰에서 나와 서울과 수도권의 고등학교에서 짧은 기간 동안 미술교사로 일했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후에 박서보를 협회에 가입시켰으며, 그의 제안을 받아 동인전의 이름을 "현대전"이라고 약칭하고 제 2회부터 함께 해나갔다. "현대전"을 통해 한국의 앵포르멜[2] 운동을 이끌었으며 1961년 파리 비엔날레 등에 작품을 출품했다.
대학 은사였던 김환기의 주선으로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4년간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 재단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여기서 그는 다시 백남준의 눈에 띄어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였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다. 당시 박서보의 추천으로 1971년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온 이우환과도 이 때 만난다.
김창열은 파리 남쪽 팔레조(Palaiseau)의 마굿간을 공방으로 쓰던 독일의 한 젊은 조각가에게 작업실을 이어 받아, 여기서 부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 동거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재료 살 돈을 아끼려 캔버스 뒷면을 물에 적셔 묵힌 후 물감을 떼어 또 그리는 식으로 재활용하던 어느 날, 캔버스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마침내 1972년 물방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3]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의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들어 기사화되고, 이후 다른 신문사에서도 앞다투어 취재를 해가면서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전위미술 전시회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 초대받아, 검은 바탕에 오롯한 물방울 하나와 그 그림자를 그린 〈Event of Night, 1972〉을 출품하며 유럽에서 데뷔했다. 1973년에는 놀 인터내셔널 프랑스에서 물방울 회화만을 모은 첫 프랑스 개인전을 개최하여 '물방울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재료 연구를 하던 중, 1975년 다락방에서 묵은 신문 더미를 발견하고 ‘르 피가로’ 1면에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렸으며, 이 때 처음으로 문자와 물방울의 조합이 시작된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친 표면이라는 마대 재질의 특징을 잘 살리는 한편, 이러한 표면에 맺힐 수 없는 영롱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했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마대 자체를 여백으로 남겼던 초기와 달리 한자 체나 색점, 색면 등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동양의 정서를 끌어들였다. 물방울 역시 70년대의 투명한 물방울과 달리 색채가 들어가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1990년대에 선보인 ‘회귀’ 연작은 인쇄체로 또박또박 쓰인 천자문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무리 지어 화면 전반에 흩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두고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서양 평론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한자 위에 물방울이 그려진 그 구성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진다고.
2021년 1월 5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족으로 부인 마르틴 질롱 씨와 아들 김시몽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 교수, 김오안 사진작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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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아들 김오안이 어느날 문득 자신이 부친인 김창열 화백으로부터 받은 예술적 영향이 지대하다는 생각이 들어, 틈틈이 부친을 담은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영상이 모여 김창열의 작품세계와 일생을 탐구한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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